크리스마스 이브의 매화수란.
친구가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 뭐 할거냐고 물어봤다.
이브는 케빈과 해리포터의 날 아닌가..?
그러자 이태원에서 같이 놀자고 했다.
오. 나 이태원 한번도 안 가봄. 그러자고 했다.
재즈바에 가자고 했다. 오. 이것도 한번도 안 가봄. 그러자고 했다.
내심 이태원에 사람 겁나 많겠지.. 조금 걱정이 된다.
생각해보니 3년전 이브 때에도 이 친구와 함께 한 듯 하다.
그 때는 홍대에서 만났는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노닥거리다 술 한잔 하자는 친구의 말에 ㅇㅇ동의.
하지만 이브라서 모든 술집에 사람이 그득그득.
우리는 사람이 많이 없을 법한 전통 주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파전과 매화수를 시켰는데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우리는 연신 감탄하며 파전과 술을 입 안으로 쓸어담았다.
정신 차려보니 매화수 9병이 내 옆에 일렬로 서 있더라고.
그래도 워낙 음료 같은지라 음 맛있다^^ 이러고 나섰다.
밖을 나서는데 배경이 심상치 않다.
나는 몰랐다. 매화수가 마실 때는 모르다가 일어나면 한번에 훅 간다는 사실을.
그래도 살짝 어질어질한 상태라 집에 갈 수 있겠다 싶어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행복하게 집에 갔으면 매화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매화수는 악마의 술이었다.
지하철의 온기가 살갗에 닿자 알콜은 빠른 속도로 온몸에 퍼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려면 한시간은 꼼짝 없이 있어야 하는데
내 상태는 한시간을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운 좋게도 자리가 나서 앉아 가는데 졸음도 밀려왔다.
나는 주사랄 것이 딱히 없는데 그나마 꼽자면 술을 마시면 졸립다.
만취한 상태에서 자면 자다 인나서 구토를 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졸리다 싶으면 집으로 돌아가 뭔가를 먹으며 술을 깬 뒤 씻고 잠이 든다.
나는 만취를 할 정도로 마시는 편이 아닌데 매화수는 진정한 복병이었음.
잠은 오고 배고 고프고 씹을 것은 없고 나는 지하철이고 집 가려면 한 시간 남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잠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책을 읽기도 하고 마구 오타를 내가며 메모장에 일기를 써내려 가기도 했다.
지금 자면 토한다... 자면 나는 토한다... 토하면 페북에 올라온다...
살려주세요.. 앞으로 매화수를 우습게 보지 않겠습니다.
저는 주제 넘게 매화수님께 덤빈 미천한 알콜쓰레기고
매화수님은 넥타르 같은 존재이시며 절대지존 짱짱맨이십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머릿속으로 매화수님께 잘못을 빌다보니 내가 내릴 역에 도착.
나는 뛰어가듯 걸어가(급해도 난 절대 뛰지 않는다. 뜀박질 최고 싫어. 계단만큼 싫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와중에 무서운 세상이란 인식은 머릿속에 여즉 박혀있어
최대한 눈에 힘을 주고 또박또박 말함.ㅋㅋㅋㅋㅋㅋ 즈기...ㅇㅇ아퐈트..가즈세여...
택시 아저씨 눈에는 등신 같아 보였을거야 아마...
한시가 조금 안되게 도착.
엄마에게 등짝 맞을까봐 최대한 조심히 샤워를 하고 로션도 바르고
가족들 다 깰까봐 머리는 말리지 못한채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 다음날 일어나니 한 마리 미역괴물이 숙취에 괴로워 하고 있었다.
그래도 안전히 집에 도착해 샤워까지 하고 잔 내가 짱 대단해 보임.
이건 이력서에도 쓸 수 있는 인내심인 것 같음.
교훈 : 매화수는 악마의 술임.
매화수 이 악랄한 놈.
매화수는 무서워.
나는 알콜 쓰레기.
나는 친구에게 문자했다.
우리 매화수는 마시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