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속에 아련한 기억 하나쯤은 있자나여?
21살 여름의 일.
여름에 진행되는 뮤지컬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여름방학을 반납하고 학교에 남았다.
내가 왜 이 과에 들어왔을까 드문드문 후회하며 밤을 새던 날들.
밥이 아닌 열량 높은 과자나 사탕, 마시멜로우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어느날 구 썸남이 휴가를 나와 학교에 놀러왔다.
말이 썸남이지 쭈뼛거리며 공강시간에 만나 카페에 앉아 있거나
새벽에 내가 마시멜로우를 사겠다고 기숙사를 나서면 아닌 척 따라나와 어두운 길을 함께 걸어주거나
지나는 길에 초코우유를 건네는 수준이었다.
더 친해지기도 전에 내가 공개고백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완전히 깨져버렸던 그런 사이.
사실 이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잘 모른다.
같은 과도 아니었고 같은 학년도 아니었으니 같이 공연을 해본 적이 없었기도 하고..
무대 위의 모습이나 카페나 편의점에서 쭈뼛거리며 말을 건네는 표정들만 기억에 남는다.
나름 내 기억속에 아름답게 포장된 그 선배가 학교에 왔다.
'리허설 중이야? 나 학교인데.. 잠깐 볼래?'
잠시 나간 그 곳에 짧은 머리가 까끌거리는 선배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남자는 머리빨이라더니. 그 말이 맞나봐요ㅋㅋ '
어줍지 않게 장난을 치며 친한척을 하니 민망해 하며 머리를 만지작 거린다.
'내가 원래 두상이 별로 안 예뻐. 좀 못생겨졌지?'
'조금?ㅋㅋㅋㅋ 장난이고 사실 보기는 어색한데 여전히 멋있네요. 잘 지냈어요?'
'응. 더운거 빼고는 괜찮아. 너는? 여전히 과자만 먹고 사니?'
나는 말 없이 가방속을 보여줬다.
'여전하네. 너 리허설 아직 남았지? 끝나고 밥 먹자. 시간 괜찮아?'
'음. 아마 이번 리허설 끝나면 또 하긴 할건데 그 전에 한번 쉬는 시간 크게 줄 것 같아요. 30분정도?'
'아.. 간단하게 먹어야겠네. 그래도 과자보단 낫겠지. 알았어 끝나면 문자보내.'
얘기를 마치고 들어오는데 여름에도 서늘하다 못해 쌀쌀한 소극장 안이 왜인지 조금 덥다 느껴졌다.
마이크 배터리를 갈아 끼우면서도 마이크를 채워 주면서도 현실감이 없다.
헤드셋으로 흘러 들어오는 무대 뒤 배우들의 우스갯소리도 웅웅거리며 배경이 되어버린다.
이미 지난 일들이 현재처럼 쏟아진다.
아. 내가 왜 이러지.
'끝났어요. 어디예요?'
답이 없다. 뭐야. 어디갔나...
머릿속은 물음표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복도 끝 연습실로 가는 발걸음이 자연스럽다.
연습실 문에 난 작은 창을 들여다본다.
선배는 그 창 안에 담겨 있었다. 연습실 한가운데 서 있는 예전과 다른 그 때와 같은 선배가.
조그맣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나는 문을 두드리는 법을 잊었다.
그리고 마주치는 두 눈. 웃는다. 창 속의 선배가 점점 커진다. 곧이어 열리는 문.
'뭐야- 왔으면 들어오지. 뭘 그렇게 보고있어. 민망하게..'
'그동안 연습했어요?'
'뭘? 노래? 아니. 군인이 연습할 시간이 어디있어. 그냥 악 지르는게 전부지 뭐.'
'여전히 예쁜 목소리네요.'
'쓸데없는 소리. 오랜만이라 너무 어색해. 나 삑사리 낸 거 봤지?'
'전혀. 나는 못 봤는 걸. 잘했어.'
'너 오기전에 냈나보다. 다행이다. 일단 들어와. 샌드위치 사놨어.'
'연습실과 소극장에서는 뭐 먹으면 안 되는 거 알아요 몰라요?'
'내가 선배인데 안 돼? 다른 애들은 선배들한테 허락받고 먹었었어. 내가 허락해줄게.'
'안 돼.'
'너 너무 FM인거 알지?'
'날씨 좋은데. 우리 그늘 있는데로 갈까요?'
'졌다. 졌어. 그럼 나 하나만 더 부르고. 괜찮지?'
'한 곡 더 부르신다면 나야 좋지. 긴 거 불러줘요.'
선배는 피아노 앞에 앉아 손을 가볍게 풀었다. 그리고 건반에 담기는 손가락.
'아. 실수. 오랜만이라.'
민망한 듯 씨익 웃으며 다시 움직이는 손가락.
샌드위치를 먹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떤 것 같아?'
'뭘 물어봐. 내가 할 말 알면서.'
'그래도.'
'잘부르네. 역시 인기 있을만해.'
'인기?'
'선배 노래도 춤도 못 하는거 없어서 우리과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 많았어요.'
'근데 왜 아무도 말 안 해줬지? 금시초문인데..'
'같이 공연은 해도 다른 과니까 모를수도 있지. 우리과에서는 장난 아니었어.'
'그래서 너는. 너한테는 나 인기 있었어?'
잠시 멈짓한다. 나는 뱉어내듯 대답했다.
'응. 있었어. 근데 선배가 도망갔잖아. 나 안 믿고.'
'그렇네. 근데 너 안 믿은 거 아냐. 너한테 뭐든 확실히 해야하는 순간이 왔는데 군대에서 날 부르잖아.'
'괜찮아요. 안 미웠어.'
'지금도 이 말을 할 타이밍이 아닌데 내가 욕심을 내고있네. 미안해.'
'괜찮아. 이번엔 내가 더 미안.'
'아. 무슨 말 할지 알 것 같아.ㅋㅋㅋㅋ 근데 못 하게 하진 못 하겠네.'
'한 번 어긋난건 그대로 둬요. 나중에 우리가 얼굴을 볼 사이라면 자연스레 그렇게 되겠지. 억지로 붙이려 하지마.'
'나중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럼 좋겠네.'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시 멀어졌다.
아쉽지는 않아. 좋은 추억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