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술먹고 기억이 끊긴 적은 딱 두번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음주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엄빠 몰래 친구들과 마셨다는 것은 아니고

갑자기 다 큰 딸이 셋이나 생겨버린 나의 아버지는 우리와의 사이를 좁히고 싶어했다.

나 또한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고 싶었다.

소주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가족 외식이 있을때마다 한잔 두잔 했던 것이 처음시작. 

그리고 고 3때는 야자가 끝나고 고 3의 고단함을 드라마를 보며 삼겹살과 소주로 씻어냈다.

(하지만 나의 고 3은 각종 만화책과 잠, 과자와 빵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단함은 무슨.)

물론 아버지와 함께. 아빠가 야근을 하시면 엄마의 허락을 받고 딱 3잔만 마셨다.


우울증이 도져버린 고 2의 어느날.

학교 야자를 쨌다.

가끔 이런 기분이 들때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참고 넘기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들이

그때는 어떻게 할 줄 몰라 무모한 행동을 저질러 버리기 일쑤였다.

그 날도 무모한 행동을 저질러 버렸다.

평소에는 혼자서 사고를 쳐놓고 조용히 덮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이 날은 달랐다.

 

우리 아파트 같은 동. 바로 5층위에 같은 학교 친구가 살았다.

꽤나 노안이었던 그 친구에게 소주 한 병 사달라 부탁했다.

그 친구는 정말 정직하게 소주 두 병을 사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나는 우리 집 베란다에서 창 밖을 보며 깡소주를 깠다.

그날은 가족들이 모두 집에 없었고 부모님은 저녁에 오실테니.

나는 태생부터 쫄보였기 때문에 집 밖에서 탈선을 저지르는 것이 무서웠다.


그렇게 머그컵으로 아무 생각 없이 꿀떡꿀떡 마시다보니 금방 동이 났고

기분이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야 이래서 어른들이 힘들 때 술을 마시나 보다 하고.

친구에게 한 병을 더 부탁할까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혼란이었다. 멀미와는 다른 메스꺼움.


당황한 나는 빈 병들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들키면 혼나니까 치밀하게 분리수거를 하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나를 볼세라 아파트 제일 구석에 있는 공터의 제일 구석에 있는 벤치에 자리잡음.

벤치에 누워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에게 소주를 사줬던 그 친구. 담배를 태우러 나왔다가 나를 발견했다는 것.

알고보니 내가 있던 이 곳은 그의 담배스팟이었다.

가끔 공부하다 안 풀리면 이곳에서 담배를 핀다고 했다.

근데 담배고 나발이고 지금 내가 속이 너무 안 좋은데 

네가 담배를 내 앞에서 피면 내가 괜찮겠어 안 괜찮겠어?

'너 그 담배 좀...'

이 말을 끝으로 나는 기억을 잃었다.


후일담으로 친구에게 전해들었던 상황.

본인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마자 내가 구토를 했다고 한다.

네가 담배 냄새를 그렇게 싫어할줄은 몰랐다고.

근데 그와중에 머리를 한손으로 말아 잡고 옷깃도 조심히 여미고 토하는 모습이 너무 웃겼단다.

당황한 친구는 우선 나를 추스려 나를 업고 우리집으로 갔다.

가는 내내 나는 또 야 나 토 묻었냐? 묻었어? 너는? 묻었어? 나는?

마침 하교한 둘째가 문을 열어주었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잠시 긴장을 풀어버려

나를 떨어뜨렸다고. 

머리부터 떨어져서 병원에 가야하나 고민했단다.

둘째의 도움을 받아 나를 방에 눕히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내가 저지른 흔적을 치웠다고 한다.

동생은 엄마가 오기 직전 환기를 시키고 페브리즈를 뿌린 다음,

엄마에게 오늘 언니가 피곤해서 일찍 잔다고 했다고 전했다.

좋은 팀워크였다.


동생에게는 민망에서 아무말 못하고 내가 아끼는 초콜릿을 넘겨주었고.

친구는 매점으로 데려가 빵과 음료수를 갖다 바침.

그리고 성인이 될 때까지 허락되지 않는 술은 절대로 입에 안 댔다.

무조건 아빠랑 마심. 딱 세잔만.


그리고 많지 않은 시간 후.

그는 나의 남자친구이자 첫사랑이 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