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를 위해 동기들과 모일 궁리를 하던 중.
잊고 있던 한 인물이 화두에 올랐다.
나의 대학생활 첫 학기를 거하게 말아먹게 해준 소문의 시발점.
갓 스무살이 된 나는 매우 들뜬 상태였다.
나는 낯을 많이 가리기도 하고 친해지려면 오래 걸리는 편이다.
하지만 이제 나도 어른이므로 나름 단점이라 생각한 것들을 고치고 싶었다.
답지 않게 여기저기 먼저 말을 걸어보았고 사람들 틈에 섞이려 애썼다.
그 결과 많이 친해지진 않아도 간단한 대화를 나눌만한 친구들이 단기간에 많이 생겼다.
서로서로 장점을 찾아내 칭찬을 해주며 서서히 친해졌던 것 같다.
새로운 친구들은 나의 눈웃음에 호감이 간다고 칭찬해줬다.
'역시 웃으면 복이 오나봐' 기뻐하며 더 친절히 사람들을 대했다.
그렇게 한 친구와도 친해졌는데 이게 내 첫학기 생활을 조질줄이야..
그는 항상 쌈지 운동복, 가방, 신발을 풀셋으로 착용하고 다녔으므로 쌈지로 칭하겠다.
쌈지는 착한 친구였다. 처음엔.
순박하고 구수한 말투로 우리과에서 제법 평이 좋은 친구였다.
언제 어디서든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언제나 도움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도 참 좋은 친구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느날 내가 애지중지 아껴온 이어폰이 고장이 났다.
'아. 비싼건데. 시급이 너무 짜서 알바비가 얼마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냥 싼 거 살까.'
자판기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친구에게 얘기를 했었다.
그 다음날 쌈지는 나에게 본인이 쓰던 이어폰을 내밀었다.
어떻게 알았지. 잠시 의문이 일었다.
그때 당시 나는 남이 쓰던 물건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은 남이 먹던 것도 잘 먹고 장소 안 가리고 잘 누워있음.
무대 뒷 편에서 2년을 먹고 자고 하다보니 살기위해 고쳐짐.. 이거 하나 마음에 드네.)
어느날은 전날 밤샘 과제로 피곤한 나는 점심을 거르고 강의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한참 자는데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아이스 초코와 핫도그, 나를 보고있는 그 애 얼굴.
나는 기겁을 하고 일어났다.
나는 불편한 자세로 자면 눈을 뜨고 잔다. 아.. 나 눈 뜨고 잤나.
아니 많이 친한 것도 아닌데 남 자는 걸 왜 보고 있지.. 불편하게.
'너 점심 안 먹고 잔다고 해서.. 이거라도 먹으라고.."
'내가 여기 있는거 어떻게 알았어?'
'나도 이 수업들어.'
'아..'
조금 민망했다. 이런게 자의식 과잉인가.
'근데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는데.'
'야. 친구가 밥도 굶고 자는데 어떻게 그냥 냅두냐.'
먹을 거 주는 사람 착한 사람. 이 친구는 마음씨가 굉장히 곱구나.
'오.. 고마워 잘 먹을게. 내일 내가 점심 살게.'
'아니야. 안 그래도 돼. 네가 사달란 것도 아닌데 내가 마음대로 사왔잖아.'
'어우야.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 그럼 나중에 뭐 먹고 싶은거 생기면 말해. 내가 사줄게.'
'알았어. 나중에.'
알고보니 나와 쌈지는 같은 전공이었다. 공연도 같은 공연에 들어가게 되었다.
본격적인 공연 준비를 하기 전에 회식을 했다.
나는 불편한 자리에서 맥주 한 잔만 깔짝거렸다.
(하지만 치킨은 혼자 다 먹음. 치킨은 불편해도 먹을 수 있어.)
회식을 마치고 각자 찢어져서 가는데 쌈지가 따라붙었다.
나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쌈지도 기숙사에 살았다.
둘이 조용히 개나리 길을 걷는데 자꾸 나보고 취한 것 같다고 나를 붙잡았다.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취한 건 본인 같은데.
원치 않은 부축을 계속 해주는데 짜증이 좀 났지만 어색한 사이라 좋게 거절했다.
그리고 운동장에 도착했는데. 이놈이 묻지도 않는 얘기를 술술 하는 것이다.
본인 집은 어디고 가족이 몇이고 여기에 어떻게 왔고.
분명 평소 같으면 오. 나와 친해지고 싶나보다. 하고 반겼을텐데
이상하게 달갑지 않았다. 빨리 기숙사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기분이 들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 너 좋아해.'
내가 웃는 모습에 한 눈에 반했단다.
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 남자친구가 있었고 쌈지에게 이성적인 호감이라곤 먼지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 뒤로 쌈지의 태도가 이상해졌다.
누가봐도 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 정도로 티를 내는 것이다.
회의 도중 갑자기 뛰져나가더니 동기들에게 끌려오듯 돌아와선 아련히 나를 본다거나
내가 나타나면 뭔가 굉장히 멋진 포즈로 뭔갈 뛰어넘고 망치질을 한다거나.
....하나도 안 멋져. 현장은 안전이 최우선임. 정석자세가 제일 멋있다.
흡연구역에 있으면 담배도 안 태우는 놈이 음료하나를 들고 티나게 기웃댄다거나
하는 그런 요상한 행동들.
제발 벽 뒤에서 아련하게 나 좀 보지마.. 다 보인다고... 이상하다고.. 무서워..
그러던 중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쌈지는 그걸 또 어디서 들은건지 나를 위로하고 싶어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긴 했어도 누구에게 위로받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서로가 딱히 좋아하지 않으면서 사귄 이상한 관계였기 때문에 딱히 속상하거나 아쉬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속상했더라도 쌈지에게 위로받고 싶진 않았다.
그의 대놓고 하는 짝사랑은 그를 점점 순정파로 만들었고
덕분에 나는 남자친구가 있었으면서도 순정파를 건드린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온도가 내려감을 느끼며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쌈지를 따로 불러냈다.
'너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뭐가.'
'불편해. 네가 나를 신경쓰는거. 너 일부러 티 내는 것 같아. 맞아?'
그리고 들은 그의 답변은 상상 이상의 충격이었다.
'네가 나 보고 안 웃어줬잖아. 왜 안 웃어?'
'웃음이 나올리가 있겠어? 불편한 사이에.'
'처음엔 웃어줬잖아. 너 항상 나에게 웃어줬잖아.'
'내가 너에게 꼭 웃어줘야해?'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너 좋아한다고 나 우습게 보지마.'
쌈지는 그러고 아련하게 떠났다.
그 후 나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일은 없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소문은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쌈지는 나에게 차인 뒤로 다른 동기들에게 들이댔다고 한다.
시작은 나에 대한 하소연.
'소소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차였다.
나는 소소가 나에게 잘해줘서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나는 소소가 좋아서 이것저것 사주고 헌신했는데
막상 고백하니 소소가 나를 싫어한다. 너무 속상하다.'
라는 말로 위로를 받으며 며칠 안 가 하소연을 들어준 동기에게 고백.
그런식으로 고백을 받은 동기는 총 8명.
어쩌면 더 있을 수도 있겠다.
처음 고민 상담을 해주던 동기들은 나를 정말 나쁘게 생각했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이런저런 소문에 휘둘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1학기동안 우리과에서 친구를 만들 수 없었다.
자다 깨서 받은 아이스초코와 핫도그가 이것저것 사준 것이 되어 버리다니...
받은 것 치곤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그리고 나는 그 놈의 눈웃음이란 것을 없앴다.
진짜 편한 사이나 상태가 아니면 웃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나의 장점을 타인에 의해 잃었다.
그 뒤 새로 생긴 습관은 웃을 때 인상을 찡그리는 것.
안 웃으려 노력하다 보니 생긴 것 같다. 나는 웃음을 잘 못 참는 타입임...
나는 나의 장점을 타인에 의해 잃었다.
동기들은 그 놈이 미친놈이라며 흥분을 하며 얘기를 했다. 덕분에 단톡 오조오억개 쌓임.
네가 가끔 찡그리며 웃으면 진짜 웃기지만 가끔 편하게 웃는 것을 보면 그게 또 아쉽더라.
아쉬울게 뭐가 있어. 아예 못 웃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웃기면 장땡임.
웃다가 거울 봤는데 좀.. 동키 같아. 앞니도 크면서 왜 그러고 웃는거야ㅋㅋㅋㅋㅋ
나름 동키 웃음도 내 매력 포인트 같음. 내 개그 캐릭터에 부합하는 웃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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