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학교를 다닐때 어디 놀러가자! 하면 갔던 곳이 월미도.

지금 생각해보면 월미도나 서울이나 거기서 거기인 거리다.

특히 차가 없는 급식이들에게는

갈아타고 갈아타서 걸어도 가야하는 월미도 보다

똑같이 갈아타고 갈아타지만 그래도 지하철을 타는 서울이 더 낫다.

(주관적인 기준. 나는 버스보다 지하철을 선호한다.)


하지만 서울은 무서운 급식이었기 때문에 정겨운 인천만 돌아다님.

(하지만 2n살을 먹은 지금도 송도를 한번도 안 가봄. 

파주 산다고 무조건 통일전망대 가본 것이 아닌 것처럼. 안 가봄.)


월미도에 가면 디스코 팡팡과 바이킹은 필수코스였다.

디스코 팡팡에서 힘줄터지게 버티고

안전바가 헐거워 엉덩이가 붕뜨는 바이킹을 태연한 척 조져야

월미도를 갔다왔다 할 수 있지. 라는 이상한 부심을 부렸다. 


그 날도 같았다.

오자마자 디스코 팡팡에 올라타 DJ의 도발에도 

끝까지 떨어지지 않은 나와 내 친구들을 자화자찬하며

자연스럽게 바이킹으로 향했다.


 (출처는 네이버. 다시봐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구만. 홀홀홀)


패기넘치는 급식이들은 맨 뒷자리에 갸아아악 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보통 여학생들이 꺄악! 한다는데 조금 다르다.  보통의 여학생들은 

갸악- 이나 끄어얽, 아아앍악!! 같은 한글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괴성을 낸다.)

안전바를 내리고 탑승.

아무리 타도 익숙해지지 않는 심장이 밑으로 쑥 내려가는 느낌에

눈을 뒤집고 으얽대기 시작했다.


재밌다!! 와!! 아저씨 세게요!! 덜덜 떨면서도 허세를 부리자

낮이라 손님이 많지 않아 외로웠던 아저씨도 같이 흥이 오르셨다.

그것이 잘못이었다면 잘못이었을까.

끝나지 않은 지옥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90도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그 날은 여름이었고, 

그동안 겨울에 가서 겨울바람에 싸대기를 맞으며 탔던거와는 달리

옷을 얇게 입었다는 것.

그때 당시의 나는 또래중에서도 굉장히 마른 축에 속해있었다는 것.

안전바와 내 몸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넓었다는 것이다.


보통의 성인 남자도 안전바가 헐거워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을

중딩의 모자란 생각으로 가벼이 여긴 문제였다.

한번 고꾸라지듯 튕겨져 나오니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발끝으로 앞의자를 간신히 붙들고 안전바가 뽑아져라 매달렸다.


아잣씨!!! 살려주쉙!!!!!앍!!!!아잣!!!!씨!!!!!

신나게 달려볼까요? 소뤼질뤄~!!!

흥이 두배로 오른 아저씨는 나와 화음을 이루며 한번 더!를 외치셨다.


16년간의 짧은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는 느낌.

사실 얼마 안 살아서 그런지 많은 기억이 나진 않았다.

그래도 소소한 추억 하나하나가 느린 버젼으로 지나가 주었다.

이 쓸데없이 배려심 많은 주마등....

허우적거리다 처음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 앞에 펼쳐진 광경. 

지금도 너갱이가 나가서인지 하늘을 바다라 썼네.

하지만 고치기 힘드니까 냅둔다. 저거 그리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

바다와 하늘이 나란히 서있었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있으면 초인적인 힘이 생긴다는 말이 사실이다.

유람선에서 갈매기한테 새우깡 주는 사람도 보였다.

사실 그 사람이 너무 부러워서 잠시 시력이 좋아진듯..


그렇게 마음씨 좋지만 흥이 많으신 아저씨의 서비스 타임이 끝나고

발가락 끝에 쥐가 나버린 나는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왔다.


나는 그 뒤로 바이킹은 물론이거니와 

밑으로 쑥 내려가는 것을 선호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나는 그때 당시의 용돈을 탈탈 털어

핫도그를 하나 사먹으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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