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은 1년 6개월을 넘게 일한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



저녁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ㅇㅇ경찰서 ㅇㅇㅇ경사입니다. ㅇㅇㅇ씨 되시나요?

네. ㅇㅇㅇ입니다.

ㅇㅇㅇ씨 아시죠?

네 압니다. 전에 직장상사였습니다.

혹시 연인관계셨나요?

아니오. 왜 그러시죠?

ㅇㅇㅇ씨가 그 쪽과 연인관계인데 당신을 성적으로 폭행했다고 자수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연인사이도 아니고 전에 같이 일한 직장상사인데요?

00일에 무얼 하셨습니까?

그때 저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같이 TV를 봤습니다.

확실히 ㅇㅇㅇ씨와 같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전혀요. 가족들과 있었어요. 지금도 집이고 부모님 계시는데 바꿔드릴까요?

아닙니다. 확실히 연인사이 아니시죠?

허. 아니라구요. 이러나 저러나 지금 제가 피해자인데 취조하듯 물어보시네요?

본인이 자수했고 감옥에 넣어달라는데 확인하고 그냥 보내려고 하는거라 확인차 연락드린겁니다.

그거 허위신고 아닌가요? 다른 처벌은 없나요? 저는 지금 이 전화때문에 정신적으로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요.

본인이 자수하러 오신거라 따로 처벌은 불가합니다.



뭐야 씨발 진짜. 이 새끼 차이더니 미쳤나? 지금 뭐하는거지? 대가리를 머리카락 심는 화분인가?

정말 말 그대로 이 생각만 들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회사에 소문이 난 것이 너무 창피해서 감옥이라도 들어가고 싶어서 경찰서에 갔댄다.

그 곳에서 감옥에 들어갈 구실로 내 이름을 거론하고 내 연락처를 알려주기까지 했다고.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건 넌데 내가 왜 거기에 엮여야 하는거지?

아니 주스 받았다고 혼자 망상으로 사귀는 새끼가 미친새끼 아녀?

여러분 앞으로 직장동료에게 원플원 주스라도 절대 나눠주면 안됩니다. 시발 진짜 나처럼 백수됨.

주스는 혼자 마시는거야. 결혼할 사람 아니면 절대 주면 안됨. 안그럼 나처럼 백수됨.

햐! 내가 새로운 것을 깨닳았네! 허! 챠! 몰랐네 몰랐어! 주스가 그렇게 대단한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는 같은 대표, 다른 지점에 다시 배치되었다.

그는 대표의 원픽이니까.

결국 제자리 걸음이었다.





2.



화나는 마음을 억누르며 출근했다.

업무 관련된 사이트들의 비밀번호들이 바뀌어 있었다.

다른 지점에 간 그 새끼가 바꿔놓았다. 그래 난 알바고 얘는 직급이 있는 새끼였지.

그 날 해야하는 일들을 다른 이들이 대신 전화해서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바꾸고 해서 간신히 마쳤다.

결국 간접적으로 다시 엮이게 된 것이다.


내가 일을 하려면 저 새끼 이름을 계속 들어야한다.

내가 일하는 동안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내 근황이 저 쪽에 전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본다. 걱정을 한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조건에 맞춰 일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집에 갈때는 무서울테니 돌아가면서 나를 데려다 준다고 했다.

나는 호의와 걱정마저도 버거워졌다.

정작 사과를 할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숨고 엄한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본다.



다른 지점에서 새로 온 실장이 말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나요?'

손바닥끼리만 아니라 손바닥이 볼에 마주쳐도 같은 소리는 나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다.



사람들이 또 내 눈치를 본다. 위로한다. 자꾸 뭘 멕인다.

미안해진다. 점점.



이 새끼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죄송하다 말했다.

창피하다고. 일을 망쳐서 죄송하다고.

니 새끼한테 피해를 입고 있는 나를 제외하고.

사과를 들어야하는 나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오직 나만 뺀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 이 새끼는 나에게 손가락 하나 대본적 없다..

당신과 나는 따로 사적으로 연락한 적도 따로 만난적도 없다.

도대체 당신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서 나한테 이러는걸까.

아니 뭘 보고 망상을 시작한거냐고....여자 안 만나봤어...? 친구도 안사겨봤어...? 그냥저냥 친한 사람도 없었냐고...

뭐라도 있었음 내가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도 않지. 나도 눈 있다고 백번 넘게 말했다.



어쩜 이렇게 손하나 까딱 안하고 나에게 수치심을 안길 수 있을까.


나는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곳에 있는 것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는 말을 남기고 그만뒀다.




3.



살면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살기는 참 힘들다.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만만치 않게 많다.

나는 미움받는 것도 싫고 미워하는 것도 싫다.

둘 다 너무 힘든 일이야.


특히 미움받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너무 힘들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미움 받는 것도 너무 짜증난다. 나도 상대방이 싫어진다.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이꼴저꼴 보고 사느니 그냥 잘라버리는 것. 관심을 주지 않는 것.


나는 관종이지만 겁이 많고 여린 관종이다.

나는 아무래도 방어와 회피에 스탯을 많이 찍는 듯 하다.

공격하기엔 여리고 힐러를 하기엔 마음이 넓지 못해.




4.




일을 할때는 일을 해야하니 밥도 먹고 아프지 말아야하니 운동도 하고 약도 잘먹고

우울하지 않게 조절하느라 힐링 한답시고 돌아다니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들어간 책만 읽는다.

연인이 있으면 있는대로 공부를 한다면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할 것이 있으면 되도록 열심히 하는 타입이다.

무언가를 할 때 몸이나 정신이 아프면 될 일도 안된다는 생각이 크다. 

이건 평소에 노력해야한다. 그래서 나름 열심히 지냈다.

남들이 보기엔 여유롭지만 나름 빼곡하게.



다시 시작한 일을 이틀만에 그만두고 나는 제대로 지낼 의욕이 사라졌다.

이럴때 나는 담배를 태우는 것도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 집에 칩거하기를 택한다.

하루종일 하는 것은 자는 것, 읽는 것, 씻는 것으로 축소시킨다.

잠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다.

밥은 먹지 않는다. 귀찮으니까. 가끔은 물을 마시는 것도 까먹고 그다음날 겨우 한모금 삼킬때도 있었다.

아플때마다 물조차도 금식 당한채 링거만 맞으며 몇개월씩 버티던 경력이 있어 이정도는 쉽다.

우울한 것도 우울한 것 나름대로 너무 무시하고 눌러 놓으면 나중에 터질 수 있으니 할 것 없을때 마음껏 우울하도록 냅뒀다.

평소에는 애써 피했던 자기파괴적인 이야기들을 읽어내리며 책속의 타인은 어느정도까지 내려갈 수 있나 가늠해본다.


즐거움을 쫒는 행위도 에너지가 있어야 할 수 있다.

지난 일주일간 상당히 큰 에너지를 소모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방전된 나를 잠시 방치하기로 했다.




5.



4일동안 열심히 방치하고 오늘 잠깐 나를 챙기느라 밖에 나갔다옴.

방치도 너무 오래하면 못쓰게 되니 잠깐 잘 작동되나 확인차.

일단 일상생활, 사회생활 문제 없고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들을 찾고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개... 아니. 그 놈을 싫어하진 않는 것은 아니다. 존나 싫다. 존나. 진짜 존나. 씨발.

욕은 평소에는 되도록 쓰지 않고싶지만 저새끼는 욕 좀 해도 될 것 같다. 사람취급도 하기 싫은걸 어떡합니까 그럼.


나름 뿌듯했고 위로 받았고 즐거웠고 힘들었다. 정신 말고 몸이.

내가 운동을 너무 쉬었네....

그렇다고 다시 운동할 생각은 없다. 당분간은....아마도....

오랜만에 끼니다운 끼니를 챙겼다. 그것도 소곱창으로 먹음. 역시 먹을때는 확실하게 먹어야함.

이제 배도 채우고 기분도 달랬으니 앞으로 며칠만 더 방치해야지.


게으른 삶이 너무 좋아서 4일로는 모자르다.

오늘의 감동을 잠들어 잊어버리기 전에 남기고 싶은데

아침부터 들고 뛴 체력없는 내 몸뚱아리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 하루 이틀정도는 거뜬히 밤을 샐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야겠다.


내일 내가 귀찮지 않으면 다시 올게.

언제나 노력의 시작은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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